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울리히 츠빙글리 (문단 편집) ==== [[사순절]] [[소시지]] 사건 (1522년) ==== 1519~1520년 [[취리히]]에서 [[흑사병]]이 퍼졌고 츠빙글리도 죽을 뻔 했다. 츠빙글리는 이를 [[하나님]]의 계시라 여겨 [[교황청]] 성직록을 거부했으며 [[1522년]] 이르러서 완전히 대립 구도로 들어서는데, 다소 사소해 보이는 사건이 그 발단이었다. 바로 [[금육재|육식이 금지되는]] [[사순시기]]에, [[취리히]] 출판업자 프로샤우어 등이 [[소시지]]를 먹은 것이다. 이들에 대한 처벌을 주장하던 [[가톨릭]]에 대해 츠빙글리는 반발했다. "[[사순절]] 육식 금기는 아무런 성경적 근거가 없으며, [[하나님]]이 준 음식은 무엇이든 먹을 자유가 있다"는 것이다.[* 이는 현대에도 [[개신교]]의 기본 입장이다. "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길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'''거짓말하는 자들이라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'''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[[하나님]]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"ㅡ개신교 성경 디모데전서 4:1~5, [[가톨릭]] [[성경]] [[티모테오]]에게 보내는 첫번째 서간 4: 1~5] 이 사건이 도화선이 돼 [[취리히]]는 [[가톨릭]] 교회 지지파와 츠빙글리 지지파로 나누어져 분쟁이 벌어졌다. [[1523년]] 1월 29일 열린 토론회에서 츠빙클리는 67개 신조(67 Articled)를 내세우며, [[성경]]보다 인간의 전통을 강조하는 [[로마]] [[교황청]] 때문에 교회의 부정부패가 발생했다고 지적하였다. 결국, 몇년에 걸친 분쟁 끝에 결국 츠빙글리의 의견이 승리했다. 모든 교회의 성직 위계 제도[* [[주교]]>[[신부(성직자)|신부]]>[[부제(성직자)|부제]]. [[교황]]과 [[추기경]]도 주교이다.]가 부정되고, 도시 교회의 [[이콘|성화]]와 [[성상(조형물)|성상]]이 파괴되며 [[수도원]]이 폐쇄됐다.[* 다만 일부 장식적 요소는 그대로 남겨두는 사례도 있었다.] [[사제]] 독신제도 역시 불필요하다고 보아 철폐됐다. 츠빙글리는 안나 라인하르트라는 과부와 [[동거]] 중이었다.[* 그런데 당시 [[가톨릭]]은 말만 독신이지, 실제론 [[교황]]의 [[사생아]]들이 [[추기경]]을 맡거나 하는 판국이었다.] 얼마동안은 [[미사]]는 [[가톨릭]] 예식대로 유지됐으나, 츠빙글리는 [[1525년]] 4월 13일 [[성목요일]] [[미사]]를 없애고 스스로 고안한 "주님의 만찬" 의식을 처음으로 시작했다. [[종교음악]]까지 폐지한 것을 제외하면 이것이 [[변경예배|현대 개신교 예배 방식]]의 원형이라고 볼 수 있기도 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